숫자 둘이 전부를 정해
글이 얼마나 어려워도 되는지는 독자에 대한 딱 두 가지가 정해. 주의를 얼마나 쓰기로 하고 왔나, 그리고 되돌아갈 수 있나. 나머지는 전부 — 주제도, 저자의 실력도, 지면의 권위도 — 그 둘 뒤야.
표면 몇 개를 그 격자에 올려보면 예산표가 떨어져 나와. 에세이 독자는 일하기로 하고 왔고, 다시 읽을 거고, 깊이를 원해. 그러니 불친절이 장르의 기능이고, 평평하게 만들면 그 물건이 망가져. 강의는 동기 있는 독자가 멈췄다 이어갈 수 있어. 그러니 두 번째 읽기에 보답하는 한 까다로워도 돼. 가볍게 훑는 독자는 의무도 없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 그러니 이야기가 무게를 져야 하고. 그리고 영상 시청자는 주의를 빌려줬고, 출구가 엄지 하나 거리고, 되감기가 아예 없어. 그래서 표에서 제일 어려운 표면이야. 중립적인 게 아니라.
왜 이게 양쪽으로 베나
그 표의 두 줄이 함정 전부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실패해.
내부 문서 줄이 기술 문서 쓰는 사람의 감각이 어긋나 있는 이유야. 엔지니어가 쓰는 것 대부분은 문서고, 설계 기록이고, 미래의 관리자한테 남기는 메모야. 맥락을 통째로 쥐고 있고 한 문장을 세 번 읽을 수 있는 독자용이거든. 압축되고 추상적이고 절이 겹겹인 문장이 거기선 맞아. 그게 네가 유창해지는 어투고, 기본값으로 튀어나오는 어투야. 그걸 영상에 들고 가면 치명적이지. 시청자는 그 맥락이 하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으니까.
에세이 줄은 과잉 교정을 막는 방어벽이야. 이건 뭐든 쉽게 쓰라는 명령이 아냐. 어떤 지면은 독자가 일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고, 거기다 방송 기준을 들이대면 반대 경우만큼이나 확실하게 망가뜨려. 규칙은 맞추라는 거지 낮추라는 게 아냐. 절반만 내면화한 사람은 어긋남 하나를 다른 어긋남으로 바꿔치기한 거고.
방송의 기본, 그리고 이게 지능 얘기가 아닌 이유
제일 어려운 줄의 기준은 방송인의 경험칙이야. 중학생 눈높이에 맞춰라. 모욕처럼 들리는데, 기전을 보면 관객이 얼마나 똑똑하냐랑 아무 상관이 없어. 주의는 빌린 거고 출구는 엄지 하나 거리야. 문장 하나가 무슨 뜻이었는지 헤아려야 하는 시청자는 이미 다음 문장을 안 듣고 있어. 그런 게 두 번 연달아 오면 떠나고.
그래서 단단한 결론이 나와. 영상에서 그냥 어렵기만 한 문장은 좋은 문장의 못한 판본이 아냐. 실패한 문장이야. 시청자가 받은 적 없는 문장. 우아함은 이해 못 시킨 것에 대한 변호가 못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