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아다니지 않기로 하기
이 작업물이 나가는 채널은 일부러 불친절해. 도달을 최적화하지 않고, 관객을 넓히려고 문턱을 낮추지 않고, 어차피 안 남을 시청자를 붙들려고 설명을 더 붙이지 않아. 예술가의 호사처럼 들리는데, 재밌는 건 이게 공학적 허가로 작동한다는 거야.
관객을 쫓아다니지 않으니까 화면이 자기 설명을 할 의무가 없어. 빽빽해도 돼. 시청자가 대번에 해석 못 하는 걸 내놔도 되고. 두 번째 시청에 보답해도 되는데, 그건 첫 시청이 놓치는 게 들어 있어도 된다는 뜻이야. 목표가 한계 시청자를 붙드는 거면 이 전부가 기본적으로 금지돼.
두 입장은 진짜로 양립 불가야
이걸 절반만 취할 순 없어. 한계 시청자를 최적화한다는 건 모든 프레임이 맥락 없는 사람한테 즉각 읽혀야 한다는 뜻이고, 그럼 밀도 상한이 제일 덜 투자한 사람이 첫 통과에 흡수할 수 있는 만큼으로 잡혀. 그 상한이 낮아. 일부 시청자는 못 따라온다는 걸 받아들이면 상한이 풀리고, 그 위에서 가능해지는 작업은 종류가 다른 작업이야.
둘 다 가지려 하면 제일 나쁜 결과가 나와. 가벼운 시청자를 잃을 만큼 빽빽하고, 진지한 시청자를 지루하게 할 만큼 설명이 붙은 내용. 그건 절충이 아니라 양쪽 관객 다한테 실패하는 설계야. 그리고 제일 흔한 형태이기도 해. 결정을 안 하면 나오는 게 그거니까.
허가가 요구하는 규율
이 허가는 난해함의 면허가 아니고, 여기가 남용하기 쉬운 지점이야. 밀도는 벌어야 해. 빽빽한 프레임은 요구한 주의에 보답해야 하고, 붙들고 씨름한 시청자는 뭔가를 받아 가야 해. 아무것도 안 돌려주는 난이도는 불친절한 채널이 아냐. 같은 옷을 입은 못 만든 물건이지.
정직한 시험은 두 번째 시청이 첫 번째보다 더 주느냐야. 그러면 그 밀도가 내용을 싣고 있었던 거고. 두 번째 시청이 같은 걸 더 느리게 줄 뿐이면 그 난이도는 장식이었고, 허가는 아무것도 아닌 데 쓰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