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생각을 여는 세 가지 장면
류츠신의 삼체에는 섬뜩한 표현이 나와. 더 발전한 문명에게 인간은 벌레일 뿐이야. 적도 동반자도 아니고, 주목할 가치조차 없는 수준의 복잡한 존재지. 삼체 문명의 지자, 곧 지능을 지닌 입자는 우리가 개미를 바라보듯 무심하게 인간을 바라봐.
이 장면은 멋을 부리기 위한 공상과학 설정만은 아니야. 우리가 쓰는 틀을 점검하게 해 주지. 더 넓은 틀이 존재한다면, 지금 우리의 틀은 그 안에서 어떻게 보일까?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두 개 더 있어.
- 체스판 위의 개미. 그랜드마스터들의 대국 중 체스판을 가로지르는 개미는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는 개념조차 없어. 개미에게 보이는 것은 칸으로 나뉜 지형과 장애물처럼 놓인 말뿐이야. 실제로 펼쳐지는 일의 구조는 개미가 가진 틀보다 두 단계 위에 있어. 개미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그 틀에 게임을 알아볼 기준축이 없기 때문이야.
- 우주를 이해하려는 아메바. 아메바도 화학 작용을 하고 움직이며 자극에 반응해. 하지만 은하를 이해하려면 아메바에게 없는 기준축이 필요하지. 아메바가 잘못된 게 아니라, 아메바의 틀이 그곳까지 닿지 않는 거야.
이 말의 뜻과 뜻하지 않는 것
이것은 인간이 쓸모없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인간은 놀랍도록 유능한 생물이고, 뉴턴에서 아인슈타인과 양자로 이어지며 생각의 틀을 갈아 끼운 놀라운 기록도 가지고 있어. 다만 눈금을 다시 맞춰 보자는 거야. 모든 지능이 자기 틀 안에 있듯 인간도 하나의 틀 안에서 생각하는 지능이야. 아무 자리에도 서 있지 않은 채 세상을 보는 시점은 없어.
눈금을 맞추고 나면 몇 가지 생각이 따라와.
- 각 시대가 가장 자신 있게 내놓은 과학적 주장은 나중에 늘 부분적인 것으로 드러났어. 오늘 우리의 주장도 아마 그럴 거야.
- 의식, 자유의지, 생명, 지능, AI처럼 지금 쓰는 분류는 몇 세기 뒤에 낡고 순진해 보일지 몰라. 우리가 18세기 생물학의 생기력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야.
-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어. 확신을 느슨하게 붙들면서도 그 확신을 바탕으로 행동하면 돼. 틀은 실제로 쓸모가 있지만 결코 전체는 아니야.
관점 트랙을 마치며
이 트랙은 한 단계 위에서 다른 트랙들을 바라보는 과정이었어. 퀘스트의 나머지 트랙도 저마다 하나의 틀 안에 있어. 힘은 뉴턴의 틀, 규모는 아인슈타인의 틀, 생명은 객체 지향의 틀, 확률은 양자의 틀을 쓰지. 각 트랙은 이 엔진은 여기에서 작동하고, 여기까지가 한계이며, 이곳에서 깨진다고 말할 거야. 0번 트랙에서 익힌 모형과 한계의 습관을 구체적인 관점에 적용하는 셈이지.
그리고 이 모든 틀은 다시 인간, 문화, 전문 분야라는 세 겹의 틀 안에 있어. 틀 없는 시점은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의 틀을 알아차리고, 벽에 부딪히면 엔진을 갈아 끼우며, 확신을 움켜쥐지 않고 가볍게 드는 것이야.
이것이 이 퀘스트 전체를 압축한 실천이야. 이제 5%의 각도로 들어가 보자.